김규항님의 글을 보면, 제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평소에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으나 사고의 깊이의 짧음으로 인해 답을 얻을 수 없었던 주제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주변 어른들에게 듣고 배우고 싶었지만 듣지 못해서 가려웠던 부분을 속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무언가 가르침을 받으려면 마땅히 선생님을 찾아가서 여쭙는 것이 예의에 맞겠으나, 선생님도 매우 바쁘신 것 같고, 현실적인 제약이 있어서, 웹의 힘을 빌려리고자 합니다. 혹시나 김규항님이 이 트랙백을 보시면 짧게나마 대답을 해주시면 참 감사할 것 같습니다.
(중략) .....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자선이나 적선은 실은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과는 다르다. 나와 내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끝없이 더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에 비추어 선량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 역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후략)
저는 지난 번에 올리신 글 중에서 이부분이 가장 크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바로 어제 명동거리의 구세군 자선냄비에 천원짜리 한 장을 넣으면서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연 내가 가진 돈의 일부,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를 나누는 것이 저 분들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만한 행동이었나.. 말이죠.
예수님은 '인자의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사시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친구의 삶을 살았는데, 나의 삶은 어떠한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면 이렇게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고, 개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누구를 향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으나,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향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 삶 속에서 제 이상과의 괴리감을 느낍니다. 스스로가 위선적이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근본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위에서 김규항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예수의 사랑이 내게 없는 것이 그 근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현실적으로 제가 부딛혔던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재작년 초겨울, Z 브랜드 샵에서 빨간색 이쁜 목폴라 니트를 보았고,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충동적으로 구매를 했습니다. 15만원이었습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직장인이어서, 그게 그렇게 저에게 큰 부담이 되는 돈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옷에 꽤 큰 돈을 들인 셈이었습니다. 약간 마음에 걸리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저는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있고,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월급을 펀드에 한 1년 동안 열심히 부었더니 작년 가을쯤에 대박이 되어있더군요. 떨어지기 전에 다 털어버리고 수익금의 일부로 좀 더 비싸고 좋은 기종으로 업그레이드를 했죠.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그 때 주변에 아는 한 형이 제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의 그 '좋아함'으로 인해 너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배제될 수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보라는.. 그런 비스무레한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생각은 들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두 가지 일이, 저의 돈관리와 소비생활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기준이 세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뿐이지, 뭔가 확실한 변화가 생겼다든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문제는 문제인건지,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에 말입니다.(아... 이 빈곤한 철학...)
그렇습니다. 저는 현실적인 기준이 어떤 것이 되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경제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기준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돈이 많이 드는 카메라 취미는 버리는 것인 맞는건지, 15만원짜리 폴라티를 산 것은 정말 사치였는지... 쓰고 보니 이 무슨, 10대가 쓰는 글도 아니고 왜 이리 유치한지... 쪽팔립니다만, 이런 것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할지 정확히 배우지 못했다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 목사님, 선생님, 주변 어른들과 형들... 글쎄요, 네 믿음과 신앙에 거리낌이 없다면, 네 자신에게 솔직해졌을 때 거리낌이 없다면 괜찮다. 라는 정도의 말이 지금까지 제가 들어왔던 말의 전부입니다. 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말입니까.
엄마랑 싸워서 아우디 A6에 기름 넣을 돈이 없다고 절망에 빠진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의 기준은 무엇이 될까요.
나는 과연 20년 뒤에 내 자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면... 깝깝합니다.
제가 너무 오버하는건가요? 하지만 저한테는 참 헷갈리는 말입니다. 정말 맞는건지 확신도 잘 안오구요.
물론, 구체적인 기준이 되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떤, 눈에 보이는 기준이 있다면, 하나의 율법이 되어 바리새인과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 기준만 넘으면 난 선하다... 라는 착각 같은 것 말이죠.
그래서 결국은, 모르겠다. 라는 결론에 빠지게 된 것 같습니다.
김규항님이 말씀하신,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 예수의 이웃사랑의 핵심이라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소유에 대한 지나친 소비로 인한, 자연스러운 이웃에 대한 배제에 대한 문제는 과연 어떻게 해결 될 수 있을지요..
나는 과연 그 경계를 지우고 살고 있는지 어떻게 스스로 알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잠시 학업 때문에 일을 쉬고 있어서 벌이가 없습니다만, 돈을 벌 때는 제가 위에 말한 소비.. 그 이상으로 기부도 하고 컴패션 같은 단체에 후원도 하고.. 주변에 어려운 친구에게 되돌려받지 못할 돈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나눔에 망설임없이, 기꺼이 나누어 줄 수 있다면, 괜찮은걸까요?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그냥 가슴 속에 답답했던 것을 풀어낸 것 같네요.
저는 단지, 김규항님의 글에서 깊은 통찰들에 감탄을 했고, 선생님의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요.. 김규항님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서 여쭈게 되었습니다.
블로그를 보니까, '고래' 일을 하시는 것을 보니 후학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도 있으신 것 같고 해서요.
한 말씀 나누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근데 트랙백 보시기는 하시나요? T.T)
전문 보기
28 그런데 율사 하나가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훌륭히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다가와서 그분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렇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인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네 온 힘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31 둘째는 이렇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계명들보다 더 큰 계명은 달리 없습니다." 32 그러자 율사는 예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옳게 말씀하셨으니, 과연 주님은 한 분이시고 그 밖에 다른 주님은 없습니다. 33 그리고 온 마음으로, 온 슬기로, 온 힘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나 친교제사보다 더 낫습니다." 34 예수께서는 그가 현명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마가 12:28~34)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라 해도 마음의 귀가 열린 사람은 아무 편견 없이 대했다. 예수는 이 율법학자와 이례적으로 보일 만큼 정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다. '계명'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명령한 혹은 당부한 삶의 방식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이 계명이다. 예수는 그 계명의 첫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인가? 종교적 제의나 예배 따위를 통해 하느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 다른 종교나 신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 하느님을 주장하는 것?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뭔가를 말하기 전에 하느님이 누군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하늘은 땅과 분리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였고 하느님은 그곳을 상징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늘이란 일정한 방향을 가지거나 어떤 분할된 공간이 아닌 단지 지구의 대기권이거나 외기일 뿐이라는 걸 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다고도 땅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물리적 제한을 초월해 모든 곳에 동시에 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 기독교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어 온 서양세계에서 하느님은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곽에서 절대적 힘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마음대로 관장하는 존재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은 그가 자행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묵인 아래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세속적인 탐욕에 초탈하여 진지하고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누구보다 종교적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무신론을 선택한다. 오히려 현실적인 욕망과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강퍅하게 주장하며 '주님, 주님' 부르짖곤 한다. 과연 하느님은 이런 정신적 참극을 벌이게 하는 그런 존재일까?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성서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27) 물론 여기에서 '모습'은 눈, 코, 입 같은 외적인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지어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서양식 신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양 정신에서 특히 한국의 민간 사상과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관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소중한 실마리를 준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 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 받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이런저런 종교적 형식에 기대어 나를 초월적인 상태로 끌어올리는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내고 내 본디 모습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세속적인 성공 따위에 대한 사랑을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삶을 끝내고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내 안에 존재한다. 내 아내에게도 내 자식에게도 내 부하나 노예에게도, '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모든 낯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존재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자선이나 적선은 실은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과는 다르다. 나와 내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끝없이 더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에 비추어 선량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 역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며 예수의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는 건 모순된 일이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반 예수적인 경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맑스 이래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라는 종교 체제가 현실에서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체제의 앞잡이였거나 지배체제 자체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기독교와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데 그들이 굳이 예수를 기독교에서 분리시켜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어쨌거나 자본주의가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사랑에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gyu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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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네요 어려워요..
답변이 도착했다 ㅎㅎㅎ
암튼, 해피 뉴 이어!!
어떻게 답변이 왔는지 정말 궁금하네.
혹시 가능하다면 메일로 좀 ㅎㅎ
해피 뉴 이어~